2021 Aug. vol.1 프로젝트 연구팀 '턱 괴는 여자들'의 정수경, 송근영입니다. 턱 괴는 여자들은 사회의 이면에서 비주류로 치부되는 ‘어떤 것’을 꺼내와 탐구합니다. 하나의 테마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를 통해, 무엇을 했기에 그리고 왜 비주류가 되었는가를 다양한 관점으로 살펴봅니다. 동시에 비주류로 일컬어지는 것에 대한 역사적/사회적/경제적/정치적 맥락을 살펴보고 이를 표현한 시각예술과 문화 콘텐츠를 찾아봅니다. 비주류에 관한 오해와 이해가 과거와 현재 사이에 변화한 지점은 없는지, 우리의 문화와 타 문화 사이에서는 어떻게 다른지도 비교합니다. 이런 연구의 방법론을 트랜스 미디어 혹은 보더리스로 일컬을 수도 있겠습니다. 턱 괴는 여자들의 목표는 사회 문제를 문화예술과 혼합하여 바라볼 수 있는 넓은 시각을 직조하는 것입니다. 장르를 뛰어넘어 하나의 맥락을 추출하는 과정에서 거시적인 통찰력을 획득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앞으로 뉴스레터라는 이 지면을 통해서는 프로젝트 관련 정보와 진행 상황들을 나누고 싶습니다. 저희가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레퍼런스들, 연구하면서 발견한 시사점들을 책 출간에 앞서 나누고 함께 교류하고 싶어요. 그런데 아마 초반은 저희 팀의 성장 과정도 녹아있지 않을까 싶네요. 저희가 맨땅에 헤딩하며 결과물을 만들어가는 과정도 흥미롭지 않을까요? 시행착오와 고생하는 과정을 가감 없이 공유하겠습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얻어내는 성과들 그리고 운 좋았던 기회들 또한 나누고 싶어요.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그 짧은 시간 안에도 철석같이 믿던 구석에서 막혀버리고 의외의 곳에서 숨통이 트이는 경험을 하며 인생의 변주를 맛보고 있거든요. 그리고 첫 뉴스레터는 단둘이서만 고군분투하던 저희에게 관심을 가져주신 분들과 처음으로 '우리'를 만드는 시작이잖아요. 이 점을 기념해서 이번엔 ‘턱 괴는 여자들’ 팀과 첫 번째 프로젝트에 대해 정식으로 소개하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턱괴녀의 연구집을 구성하는 부분 중 하나가 인터뷰인데요. 이번엔 지면 너머로 함께 해주시는 분들을 상상하며 저희가 인터뷰이가 되어 정성스럽게 답해보았습니다.
* 정수경 연구자의 미미정(@mee.mee.jung) 계정에서 턱괴녀 팀과 관련하여 받아온 질문들을 참고하였습니다.
Abbreviation :
턱 괴는 여자들을 ‘턱괴녀’로 표기합니다
정수경 연구자를 MMJ, 송근영 연구자를 K로 표기합니다. 왜 턱을 괴나요?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어느 정도의 사색을 소유할 수 있을까요? 사무실이나 작업실 책상에 앉아서? 커피 한잔할 때? 아니면 잠들기 전? 생각의 넓은 공간으로 다이빙하는 순간의 자세를 포착해본다면, ‘턱을 괴고’있을 확률이 매우 높을 거예요. 여러분 이 턱을 괴는 행위가 엄청나게 오래전부터 행해졌다는 것 혹시 알고 있나요? (이제부터 미술사 연구자 MMJ의 TMI가 펼쳐집니다.)
턱을 괴는 모습은 고대 그리스 장례 석관의 부조 장식에도 등장했던 아-주 오래된 행위입니다. 기원전 그리스부터 중세 유럽에 이르기까지 턱을 괴는 이미지는 육체적 고통과 함께 정신적인 고통을 내포하죠. 절망을 표현하는 자세들 대부분이 강렬하거나 순간적인 흥분으로 표현되는 것과는 달리, 턱 괴는 자세는 시간 속 내면의 사색이나 지속적인 고통을 뜻해요.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 이 ‘턱 괴기’의 의미는 확장됩니다. 미켈란젤로, 칸트 등 다양한 예시가 있지만 턱 괴는 여자들 1호 뉴스레터를 위해 저는 독일 예술의 자존심,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를 소개하고 싶네요. 왜냐하면 뒤러는 좀 우리 같거든요. 기존 사회질서에 의문을 제기하는 반골 기질이 있으며, 화가의 자화상을 연대별로 남기는 등 매우 자아도취적이에요. 때문에 뒤러는 중세 시대 장인의 위치에 머물던 예술가의 직업관을 변화시킨 르네상스 화가들 중 한 사람입니다. 예술가의 르네상스 이상을 구현하였으며 새로운 세계와 참신한 기술에 몰두하였습니다. 덕분에 구텐베르크에 의해 촉발된 인쇄물 유통망을 활용해 자신의 작품을 유럽 전역에 판매한 최초의 화가였죠. ©️Albrecht Dürer, <Melancolia I> 1514, gravure, Rome, Istituto Nazionale per la Grafica 새로운 세상에 대한 민감한 촉수를 탑재한 뒤러의 작품에도 ‘턱 괴는 자세’가 등장합니다. 1514년에 작업한 <Melancolia I>은 뒤러의 ‘정신적 자화상’으로 평가됩니다.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상징과 도상을 그러모아 놓은, 예술에 관한 화가 개인의 견해를 표현한 것으로 여겨지죠. 예를 들어 화면 왼편에 보이는 망치, 톱, 못, 집게 등의 도구들은 매커닉한 제작 시스템을 필요로하는 예술 분야를, 구와 다각형의 그리고 천사의 손에 들린 컴퍼스 등의 오브제들은 자연과학, 철학, 예술, 사회과학 등을 포괄하는 자유 인문학의 레퍼런스를 뜻합니다. 즉, 르네상스 예술가의 사상을 담아내는 도상(Iconographie)이라고 할 수 있죠.
시선을 조금만 오른쪽으로 돌려서 종이 위에 연필과 컴퍼스로 무언가를 증명하려는 듯한 천사를 볼게요. 무릎 위에 팔을 기대고 주먹 쥔 왼손으로 머리를 받히는 이 포즈. 어떤 대상에 대해 고뇌하고 골몰하고 있습니다. 뒤러는 고대에서 중세까지 꾸준하게 사용된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 즉 사색, 고뇌 등을 표출해왔던 클래식한 이 도상을 그대로 적용합니다. 그러고는 제목을 ‘멜랑꼴리아’라고 지었어요. 고대에는 우울함 혹은 애수, 우수에 젖은 듯한 감정을 뜻하는 이 개념은 신을 위한 세계였던 중세 시대에 이르러서는 신적 의미가 가득한 세계질서에 위협적이고 매우 비관적인 존재로서 부정적인 대상으로 터부시 되었습니다 (신을 위한 세계에 오점을 남기는 존재,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 취급을 하였죠!) 하지만 신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천지가 개벽한 인본주의 르네상스 시기에는 멜랑꼴리아는 창조적 상상력을 가진 천재의 특성으로 그 의미가 변화합니다. 예술적이고 과학적인 어떤 대상에 답을 논증하는 그 지난한 과정을 겪는 천재의 정신적인 우울 혹은 외로움으로 의미가 전환된 거죠. 즉, 우울은 예술가의 창조적 능력에 수반되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요. (훗날 20세기의 작가이자 문화이론가 수전 손택은 일종의 매력이 없는 멜랑꼴리함이 우울증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어요.) 르네상스 이후 인문주의 정서가 팽창하며 사회적 질서가 재편되었습니다.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뜻하는 멜랑꼴리한 감정은 근대적 주체의 고통과 방향 상실, 심리적 공황을 나타내는 키워드로 여겨졌습니다. 멜랑꼴리한 사람은 극도의 정신적 긴장 속에서 생각에 골몰하며, 타고난 정신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로 여겨지기 시작해요. 이때 멜랑꼴리한 사람들은 턱을 괴며 사색의 세계로 넘어가는 것이죠. 당시 예술가들 사이에서는 멜랑꼴리와 천재성 동일시되고 있었어요. 뒤러를 넘어 ‘미켈란젤로’, ‘칸트’ 등 내로라하는 당대의 예술가, 지식인들도 자신을 멜랑꼴리 환자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턱 괴는 자세를 통해 하고자 하는 말은 천재성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의 세계에서의 사회와 질서, 도리, 이치를 사색의 순간을 통해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돌린 르네상스인의 자세를 차용하고자 합니다. 익숙한 것에 질문하는 것 그 자세가 턱 괴는 자세의 본질이 아닐까 싶어요. 우리는 턱 괴기를 통해 물리적인 3차원 공간의 작은 사무실에서 역사 속으로 진입하고, 현재를 톺아보고, 미래를 반추해보고 싶었습니다. 턱을 괴며 찾아낸 작은 의문점들을 대답해 줄 사람들을 찾아가 질문을 조금 더 큰 판에 던져보고자 해요. 질문에 답을 내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질문에 질문을 더해 턱을 괼 수 있는 플랫폼을 구현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MMJ와 K는 오늘도 턱을 굅니다. 생각하기 위해, 고착화된 어떠한 것에 질문을 던지기 위해!
우리도 이제부터 함께 턱을 괴어 볼까요? MMJ 턱 괴는 여자들 CI를 소개합니다! K와 함께 턱괴녀를 기획하며 제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지점은 바로 ‘21세기의 턱 괴는 도상은 어떤 매체로, 어떤 표현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였습니다. 처음엔 무궁무진한 장점을 지닌 제페토의 AR 아바타를 사용했습니다. 제페토는 여러 포즈들 중 턱 괴는 자세도 제공했고요. 제페토 개발자는 미술사 연구자가 턱 괴는 도상을 찾다 찾다 제페토까지 찾아 들어간 걸 알까요? 그러나 턱괴녀의 연구가 점차 확장되고 결과물을 종이 책으로 출판하기로 결정하면서 (제페토의 저작권 사용에 대한 이슈도 배제할 수 없고요) 사색하는 모두를 포괄할 수 있는 ‘중성적인 턱괴녀 이미지’가 필요했어요. 독자들과 턱 괴는 행위를 함께 하고 싶은 생각이 컸습니다. 뉴스레터도 그 연장선상에 있고요. 바로 디자이너를 수소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턱괴녀 브랜딩부터 연구집 디자인까지 맡아주실 김지윤 디자이너를 만나 뵙게 되었죠. 합정의 한 카페에서 그를 처음 만났고 우리는 프로젝트 이야기를 주절주절 나눴어요. 인사이트와 레퍼런스를 교환하며 턱괴녀의 CI를 기획했습니다.
이쯤에서 턱 괴는 여자들을 위해 꼽았던 레퍼런스를 소개해드리고 싶어요.
200년 전 영국 런던에서 조개껍질을 팔던 작은 앤티크 가게로 시작해 지금은 세계적 에너지 기업을 설립한 ‘Shell’의 로고입니다. Shell의 CI는 오랜 기업의 역사와 궤를 함께하며 여러 번의 변화를 겪었지만 저희가 주목한 것은 1968년부터 1974년까지 산업디자이너 레이먼드 로위(Raymond Loewy, 1893-1986)가 참여했던 디자인 프로젝트였습니다. 1971년 탄생한 로위의 로고가 현재 로고의 초석이 됩니다. 옐로우와 레드의 명료한 컬러 대비/ 조개껍데기의 현대적 이미지(!)/ 굵고 단정한 워드마크를 통한 가시성.
웃기지 않나요? 프로젝트 연구팀과 에너지회사라니. 한 정유회사의 사연 있는 조개 로고를 추상화시켜 명징한 이미지로 구축하는 과정이 매력적임은 물론 이미지가 지닌 미감이 마음에 들었거든요. 21세기의 사회적 맥락에서 건져올린 주제를 가시적인 연구 지도로 만들어 내는 턱 괴는 여자들의 행보도 그들과 비슷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 (파리 1대학에서 레어몬드 로위의 Shell 주유소 디자인 프로젝트를 박사 주제로 다루는 동료가 있어요. 그의 1970년대의 사회∙경제적 맥락 속에서 탄생한 산업적 미감에 관한 연구 발제를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일상에서 건져올린 주유소의 디자인을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한 연구가 꽤 인상적이었기에, 머릿속 한편에 꼬옥 담아 놓았던 레퍼런스였답니다. 언젠가 턱 괴는 여자들이 커진다면 그 동료도 꼭 초빙하여 줌 강의를 해보면 참 좋을 것 같은데 말이에요.) 다시 돌아와서, 저희가 요청드린 점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첫 CI는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었어요. 첫 회의 후, 감상적이기보다 사색과 사유에 더 가까운 느낌을 찾기 위해 저희는 눈 뜬 모습을 제안했어요. 그 후로도 몇 차례의 피드백과 수정을 거쳐 턱 괴는 여자들의 최종 이미지가 완성되었습니다. 미술사 내에서 턱 괴는 도상이 처음엔 눈을 감고 내면의 이야기를 샅샅이 살피던 모습에서 눈을 뜨고 나를 둘러싼 세상과 사회를 응시하는 모습으로 변화했듯이, 우리는 턱 괴는 여자들의 군상이 눈을 뜨고 세상을 톺아보는 이들이길 바랐습니다. 그리고 하나가 아닌 다수이길 바랐고요. 이건 저와 K일 수도 혹은 이 글을 읽는 다른 누군가들과의 사색의 연대일 수도 있어요. 결국 아래의 워드마크와 세 심볼마크가 탄생했어요. 단단하게 읽히는 워드마크는 저희의 아이덴티티를 더욱 잘 살려줍니다. 턱괴녀 워드마크 턱괴녀 심볼마크 (1), (2), (3) 📣 여러분! 저와 K는 (벌써) 하나하나가 다 예쁘고 소중해서 못 고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여러분의 소중한 의견이 필요합니다. 첫 뉴스레터 독자분들이신 만큼 함께 턱괴녀를 만들어 나가고 싶은 마음이 커요. 세 가지 타입의 심볼마크 중 하나를 골라주세요! 가장 많은 선택을 받은 심볼마크로 SNS와 다음 뉴스레터에서 찾아뵐게요. 뉴스레터 하단의 투표링크 클릭 MMJ 코너 속의 코너 이렇게 찰떡같은 디자인을 해주신 분이 궁금할 수도 있는 누군가를 위해서, 함께해 주시는 김지윤 디자이너를 소개하며, 제작 과정에서의 단상도 들어보겠습니다. 디자이너는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맑은 눈망울의 소유자, 무엇보다도 책과 언제나 함께하시는 분이에요. 안녕하세요? 김지윤입니다. 이것저것 일을 벌여놓고 수습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편집 디자인도 하고 웹 디자인도 하고 그림도 그립니다. 세상에 호기심이 많고 고양이를 좋아합니다. 이전에는 웹과 편집 작업을 주로 해왔는데, CI는 처음 시도해보는 작업이어서 부담도 되고 고민도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생각했어요. ‘브랜드 네임을 직관적으로 풀어내 보면 어떨까?’ 그래서 턱 괴는 여자를 만들어갔습니다. 첫 회의에서 “너무 돌진하는 느낌말고 당차고 단단한 느낌이었으면 좋겠어요”라고 하셔서, 얇은 라인보다는 굵은 라인을 사용해서 단단한 느낌을 주려고 했어요. 브랜드 컬러는 용기와 자신감을 의미하는 오렌지 계열 색상으로 선정했습니다. 이 여자는 눈을 감고 있었는데, 턱을 괸 채로 졸고 있는 건지, 아니면 누군가가 여자의 볼에 손을 포개고 있는 건지, 아무튼 열심히는 만들었는데 애매모호한 이 느낌은 뭐지 싶었어요. 긴장 반 기대 반의 마음으로 참여한 두 번째 회의에서 두 가지의 핵심적인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눈 뜬 모습도 보고 싶어요.” 그리고 “턱 괴는 여자’들’이니까 두 명이 겹쳐진 모습도 보고 싶어요.” 피드백을 받는 순간 직감했어요. ‘이거다!’ 아직 회의도 안 끝났는데 빨리 작업해보고 싶어서 속으로 드릉드릉거렸습니다. 여자의 눈을 뜨게 하고—이렇게 적으니까 뭔가 전지전능해진 느낌—외롭지 않게 친구 한 명 붙여주니 마음에 드는 모양이 나와서 기뻤어요. 작게나마 박수를 쳤습니다. 그의 포트폴리오가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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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은 어떻게 만났나요? 신재연(@bboreumdal_yeonii)님이 보내주신 질문입니다. 턱 괴는 여자들이 처음 만난 건 2016년 프랑스 리옹에서였는데요. 저희 모두 같은 어학원에서 어학연수 중이었고 아주 잠깐 같이 수업을 듣기도 했어요. 그때는 서로 일면식이 있는 정도였습니다. 카톡은 하지 않지만 sns 좋아요는 눌러주는 사이, 댓글을 남기며 마음을 표현하는 사이였죠. 부쩍 친해지게 된 건 2018년 가을 파리에서 다시 만난 후인데요. MMJ는 파리 1대학에서 공부 중이었고, 저는 파리 9대학에서 복수학위 과정을 시작했거든요. 파리에서의 재회는 빠르게 성사되었습니다. 툭 툭 잘 던지는 성격인 MMJ가 제가 파리에 도착한 걸 알고는 만남을 제안했고, 마음이 가는 떡밥은 적극적으로 줍는 저는 덥석 물었거든요. (앞 문장을 쓰고 보니 턱괴녀의 시작도 그랬던 것 같아요. 씨 뿌리는 사람과 허투루 안 받는 사람의 조합) 그 후로 저희는 도서관 메이트가 되었어요. 유학생으로서 무사 생존하기 위해 국립도서관인 BnF로 출퇴근하는 생활을 했거든요. 오전에 출근해서 각자 공부하고 연구하다 커피도 때리고, 시험이나 발표가 끝나면 같이 맥주도 한잔하면서 학교가 다른데도 붙어있을 시간이 많았어요. 자연스럽게 대화가 늘었고 차근차근 서로 비슷한 지점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대화 주제도 점점 확장되고 깊어졌고요. 삶과 사회를 바라보는 방식이나 문제의식 그리고 하고 싶은 것 등, 서로 위로가 되고 힘이 될 수 있는 부분이 많았어요. 도서관 지하의 카페테리아, 카페인에 미쳐버린 MMJ와 단 것에 미쳐버린 K의 어느 하루. 이런 시간 틈틈이 같은 문화예술이지만 또 너무나도 다른 서로의 전공 이야기도 하고요. 저희가 ‘턱 괴는 여자들'을 함께하는 원동력을 가늠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하루는 도서관 퇴근 후에 강가 데크에 앉아서 이 주제로 열띠게 토론한 적이 있는데, 정말 흥미로웠던 기억이 나거든요. "문화부의 존재 이유? 문화 민주주의?" 전 세계에서 문화를 전담하는 정부 부처를 가지고 있는 나라가 생각보다 많지 않은데, 그중에서도 문화예술을 공공복지의 일환으로써 고려하고 개입하는 국가는 더 적다고 해요. 그중에 한국과 프랑스가 있고요. 프랑스는 오래전부터 문화예술만큼은 경제적인 계산과 논리를 배제하고 ‘모두가 생산하고 즐길 수 있어야 하는 공공재’로 여겨왔어요. 이런 '문화 민주주의' 기조와 정부의 꾸준한 투자를 통해, 소득 수준과 무관하게 문화예술과 일상이 밀착된 환경이 만들어졌습니다. 문화예술이 가져오는 삶의 윤택함과 그 힘을 모든 국민이 마땅히 누려야 하는 복지의 개념으로 정부가 상정하고 있는 것이죠. 저와 MMJ는 한 국가가 이렇게 유토피스트적인 면모를 고수하며 정책을 편다는 점이 인상 깊고 좋았어요. 정치는 그야말로 복잡한 이해관계와 돈이 빽빽하게 얽히는 작업인데, 신념을 유지해온 그들의 역사와 내공이 실감 나는 순간들이 있었거든요. 프랑스가 오랜 시간 생산과 소비의 성역 없는 정책을 고수해 얻은 것은 문화 다양성이에요. 이는 궁극적으로 사회의 사각지대를 골고루 비추는 조명이 되고요. 한편, 전례 없이 빠른 경제적 성장을 이룬 한국은 굉장히 특이한 경우인데요. 대다수 산업이 밀도 높은 발전을 이루면서 여전히 자본주의적 관성을 가지고 있는 데에 반해, 문화예술 분야 만큼은 국민의 공평한 향유권을 위해 정부가 일찍이 개입해 많은 품을 들이고 있어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해외 문화 정책을 많이 참고하고 수입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나라가 프랑스입니다(ex. 최근의 예술인 고용보험 등). 프랑스의 경우엔 국가 주도 문화 사업의 역사가 길어요. 오랜 시간 '물고기를 잡아주면서' 안정적인 환경을 제공했기 때문에 '(혼자 또는 같이) 물고기 잡는 법을 터득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시간이 충분했어요. 반면, 한국의 경우는 적극적인 문화 정책의 역사가 상대적으로 짧아서 아직 정부가 향후의 자생력을 기대하며 투자하는 단계에 있습니다. MMJ와 저는 지금의 상황에서 더 나아가 한국의 문화산업이 건강하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문화예술의 주체가 자본이나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롭고 더 다채로워야 한다는 점에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 물론, 프랑스도 모순이 많고 단점 또한 명확하게 존재하는 나라입니다. 프랑스 내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포괄하기 위해 풀어야 할 새로운 숙제도 많고요. 예를 들어, 아직도 전시나 축제 등을 기획하는 주체는 백인 행정가들 위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문화권에서 온 연구자들과 공조 연구를 하는 등 점차 그 문화예술의 주제와 장르를 넓히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ex. 오르세 미술관 전시 «Le modèle noir (흑인 모델)») 턱괴녀는 '물고기 잡는 법'을 실험하는 플랫폼입니다. 연구자 및 예술가와의 협업, 전문가의 관점과 그에 더해 참여하는 독자 (훗날의 필진)의 의견을 모으는 판을 벌이며 프랑스에서 엿본 문화 민주주의의 한 축을 실현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각 상호 주체의 자립을 도모합니다. K 둘은 어떤 사람인가요? K 숙명여자대학교와 파리 9대학에서 문화기관에 특화된 경영학 석사과정을 이수했습니다. 문화예술이 시대를 대변하고 다음 세대를 견인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으며, 미디어 콘텐츠와 책을 기반으로 비경제적인 시대정신과 논의점을 발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오래 이어온 독서모임, 두 번의 타국 살이 경험 그리고 인생의 동반자인 아토피가 현재의 모습으로 나를 다듬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고 믿습니다. 한국과 프랑스의 교차하는 상대성과 묘한 유기성을 다방면으로 경험하면서, 문화예술의 도구로 두 주체를 활용하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 어른이 된 후 더 빠르게 자라고 있습니다. MMJ 안녕하세요 MMJ로 활동하는 연구자 겸 기획자 정수경입니다. 파리 제1대학 근∙현대미술사 박사과정 겸 미술사 연구소(HiCSA) 연구원으로서, 역사 속으로 진입하기도 하고 현재를 톺아보기도 하고 근거 있는 미래를 상상하고 있습니다. 일상에서 예술이 일어나는 순간을 탐닉하고, 역사관이 변화하는 순간을 목격하는 것을 즐깁니다. 과거에는 비주류였던 지점들이 현대에 이르러서 뒤틀리거나 격변하거나 격상하는 과정을 발견하는 것을 좋아하며, 반대로 과거에는 주류였지만 어떤 과정을 통해 메인스트림에 설 수 있었는지, 그 과정은 정당한지를 논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턱괴녀의 첫 번째 주제 : 여자 야구 2020년 말, 초기 팬데믹 기간을 생산적으로 보내고자 저희는 줌 스터디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문화예술계 뉴스나 콘텐츠를 함께 보고 이야기하는 방식이었는데, 여기서 영화 <야구소녀>를 같이 보게 된 거죠. 첫 장면을 일시정지시키고 주의 깊게 바라본 기억이 납니다. 검은 화면에 문장 하나만 정중앙에 나오는데, 의학적으로 남성이 아닌 자는 부적격 선수로 분류된다는 프로 야구 규정이 1996년도까지 존치되었다는 내용이었어요. <야구소녀>를 모두 보셨나요? 영화는 현실적으로 여자 선수가 겪는 어려움과 편견도 물론 보여주지만 ‘이 룰이 없어지면서 여자도 법적으로 문제없이 (남자들만의 것이었던) 프로 리그에 도전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최윤태 감독님도 언론 인터뷰에서 “여자도 야구할 수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를 만드셨다고 했고요. 선택권조차 없던 것에서 선택 가능한 상태가 되는 것은 확실히 긍정적인 시그널이죠. 하지만 저희는 해당 규정 자체에 대한 깊은 의문과 더불어 ‘왜 여자가 굳이 남자 리그에서 뛰어야 해?’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불리한 레이스의 출전 자격을 주는 게 같은 가능성을 열어주는 건 아니잖아요. 올림픽 경기에선 페어플레이를 위해 성별을 나누고 나아가 체급을 분리하는 종목도 있는데 말이죠. 그래서 현실은 “여자도 야구할 수‘는’ 있어. 견딜 수 있다면.”에 가까워요. 야구가 하고 싶다면, 그런데 내가 여자라면, 많은 허들을 혼자 넘고 길을 개척해야만 합니다. 4대 구기 종목인 야구, 축구, 농구, 배구 중에 아직도 야구만 여자 리그가 없는 상태거든요.
©️ 최윤태, 야구소녀 ‘여자 야구 선수'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대표적인 인물이나 콘텐츠 속 캐릭터, 회화나 광고에 나오는 이미지라든지 다 좋습니다. 저희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서 많이 당황했어요. 왜냐하면 시각적으로 여자 야구 선수를 본 적이 없거든요. MMJ는 한때 야구 팬이기도 했고, 저 또한 야구 열성팬인 친구들을 따라 프로 리그 관람을 한 적이 몇 번 있는데요. 이렇듯 주위만 둘러봐도 야구는 더 이상 남자만 즐기는 스포츠가 아니고, 오늘날 프로 야구 관중의 48%는 여성이 차지한다는 통계 자료도 있어요. 그런데 야구장 안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여성의 역할은 아직 치어리더뿐이에요, 그마저도 응원단장은 모두 남자고요. 야구는 여전히 전 세계적으로 유난히 남성만의 리그를 고수하는 스포츠입니다. 국가와 인종을 막론하고 여자 야구 선수를 본 경험은 많지 않을 거예요. 그럼 야구하는 여자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요. 그에 앞서, 본 적이 없는데 있긴 있나요?
곧 출간될 ‘턱 괴는 여자들'의 첫 번째 책은 여자 야구를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요? 파고들고 끌어낼수록 감자 줄기처럼 딸려오는 떡밥들(?)이 흥미진진했는데요. 살짝 공개하면 다음과 같은 꼭지들이 있어요. ⚾️ 1982년 국가적 사업으로 한국 프로 야구가 출범할 당시, 당연히 종주국인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그럼 남성 중심적 성격 또한 백인 남성 중심인 메이저 리그의 특징을 답습한 걸까요? 사실 18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야구는 남녀노소 그리고 모든 인종이 즐기는 스포츠였습니다. 하지만 19세기부터 백인 남성 중심으로 개편되기 시작했어요. 이는 사회적 배경과 인식이 문화에도 어떻게 반영되는지, 그리고 문화의 힘을 국가가 어떻게 이용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인데요. 사실 한국의 프로 야구 리그도 독재 정권의 계획적 산물이었죠? ![]() Baseball magazine cover, 1917
©Joseph Francis Kernan (1878-1958) ⚾️ 아이러니하게도 최초의 여자 야구 리그 또한 미국에서 탄생해요. 2차 세계 대전 동안 남자 프로 선수들이 대거 징집되면서 리그를 진행할 수 없게 되자, 그 경제적 손실을 메꾸기 위해 기업들이 여자 리그를 탄생시킨 건데요. 하지만 이미 남성의 스포츠로 자리 잡은 야구를 여성들이 공유하는 과정에서 웃지 못할 해프닝도 많았어요. 예를 들면, 야구를 하는 선수들이 여성성을 잃을까봐 숙녀 수업을 필수로 듣게끔 했고 치마를 입어야 출전할 수 있었거든요. 이러한 잡음을 뒤로하고 여자 리그는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남자 선수들이 돌아오자마자 여자 리그는 해체돼요. 철저히 대체재로만 여겨졌지만, 여자 야구의 흥행성을 증명한 사례로 해석할 수도 있어요.
* 연관 콘텐츠 : 영화 <그들만의 리그> The Rockford Peaches, a professional baseball team in Rockford, Illinois. ©️ROCKFORD PEACHES ⚾️ 전 세계에서 여자 프로 야구 리그를 가지고 있는 나라가 딱 한 곳 있어요. 종주국 미국에도 없는 리그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바로 일본이에요. 일본도 미국처럼 야구에 국가적 정체성을 이입해 즐기는 나라지요. 육성 시스템과 자체 리그를 갖는 것이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들어내는지 일본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여자야구에서 만큼은 체격과 힘이 좋은 서양의 팀들을 제치고 일본이 명실상부한 세계 1위거든요. 그런데 일본은 종종 한국보다도 보수적으로 느껴지는 나라잖아요. 어떻게 여자들이 가장 공식적이고 합당한 방법으로 야구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요? 역대 여자 야구 월드컵 결과 출처 : 위키백과 여자 야구를 둘러싼 흥미로운 에피소드들, 꼬리를 무는 질문과 해답들을 저희가 준비하는 프로젝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K 📆 그동안 턱괴녀가 걸어온 짧은 길을 공유합니다 2020년 10월 스터디 시작 2020년 11월 팀 프로젝트 아이데이션 구축 2020년 12월 '턱 괴는 여자들' 네이밍 2021년 02월 인터뷰이 리스트 셋업 2021년 03월 첫 인터뷰 시작 서울문화재단 연구 지원사업 RE:SEARCH 공모 -> 05.14 선정 2021년 04월 서울시 청년청 청년프로젝트 지원사업 공모 아르코 공공예술지원사업 공모 국립현대미술관 프로젝트 해시태그 공모 2021년 05월 서울시 인큐베이팅 '샘' 공간지원사업 공모 -> 06.10 선정 마포출판문화진흥센터 Platform P 입주사업자 공모 -> 06.14 선정 2021년 06월 김지윤 디자이너 섭외 및 계약 2021년 07월 마포출판문화진흥센터 Platform P 사무실 입주 '턱 괴는 여자들' CI 디자인 구축 첫 프로젝트 투자 유치 프레젠테이션 2021년 08월 뉴스레터 창간호 발행 '턱 괴는 여자들' 사업자 등록 (예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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